그가 이처럼 일본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자리잡은 것은 스포츠에서 큰 자취를 남겼기 때문이다. 가노는 일본체육협회 초대 회장, 아시아인 최초의 IOC 위원, 일본 유도의 산실 ‘강도관(講道館)’ 창설자로 일본 근현대사에 기록됐다. 특히 유도에서 그의 역할을 단연 두드러졌다. 일본유도 대표선수들은 올림픽, 세계선수권대회에 출전하기에 앞서 필승을 기원하며 도쿄에 있는 그의 묘소를 참배하곤 한다.
1860년 일본 효고현에서 태어난 가노는 도쿄 대학 철학부에 다닐 때까지 학생 시절 왜소한 신체(158cm)를 단련하기 위해 일본 사무라이의 무술인 ‘주지술(Jiu Jitsu)’을 배웠다. 1879년 그랜트 미국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할 때, 유술을 시범보이기도 했던 가노는 1882년 일본의 여러 전통 유술을 기초로 ‘유도(柔道)’라는 이름을 붙여 ‘강도관’를 세워 문하생을 지도했다. 원래 유도가 처음 등장할 때의 명칭은 ‘강도관 유도’였다. 강도관은 현재 전 세계 유도의 총본산으로 태권도 종주국인 한국의 국기원과 같은 역할을 한다. 강도관은 국기원과 달리 도장도 겸하며 수강생들이 수련비를 내고 유도를 배울 수 있다는 차이점이 있다. (본 코너 1231회 ‘왜 유도(柔道)’라고 말할까‘ 참조)
가노는 유도 뿐 아니라 일본 스포츠, 교육 분야 발전에도 큰 역할을 했다. 일본 쓰쿠바 대학의 전신인 도쿄 고등사범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육상, 수영, 체조, 야구 등 보급에 앞장섰다. 도쿄 고등사범학교 교장으로 있을 때, 소설사 나쓰메 소세키를 교사로 불러들이기도 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를 창설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쿠베르탱 IOC위원장은 1909년 아시아에서 IOC 위원이 필요하다며 가노를 아시아인으로 처음으로 IOC 위원으로 임명했다. 가노는 1911년 일본체육협회를 창립해 회장에 취임한 뒤, 일본의 첫 올림픽 참가대회인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에 선수단장을 맡았다.
1936년 만주사변의 여파로 세계 각국의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1940년 도쿄 올림픽 유치에 성공하는데 기여한 가노는 1938년 카이로 IOC 총회를 참석한 뒤 미국을 경유해 귀국 도중 태평양 선상에서 폐렴으로 78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가노는 일본 체육계에 기여한 공로로 ‘일본 체육의 아버지’로도 불린다.
[김학수 마니아타임즈 기자 / kimbundang@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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