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KTX 시대에는 예전의 부산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터널을 10여분간 고속으로 질주하다 “이제 이 열차의 종착역인 부산역에 도착합니다”라는 객차 내 안내방송이 나온 지 얼마 뒤 열차는 서울부터 쏜살같이 달려온 고속주행을 멈추고 승객들을 토해냈다. 부산역에 내려보니 세상은 ‘상전벽해’라는 말이 무색했다. 부산 항만쪽으로 수십층의 고층빌딩이 여러개 보였고, 부산역도 현대식으로 새롭게 바뀌어 있었다. 천지개벽을 한 것처럼 보였다.
옛 모습을 찾을 수 없어 아쉬워하고 있는데 부산의 대표적인 시니어 농구 동아리 ‘5080’ 회원 김성룡(54) 씨가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그는 전형적인 화근한 부산 사나이였다. “그동안 부산도 어마 무시하게 많이 변했습니데. 이번에 내려오신김에 부산의 진짜 모습을 많이 느껴보시라예”라고 말하며 자기 소개부터 했다.
180cm 이상에 100kg 이상의 거구인 그는 마치 현대판 ‘장비’를 보는 것 같았다. 대형 트레일러를 직접 운전한다는 그는 한때 엘리트 농구 선수 출신이었다. 부산 중앙고에서 전국가대표 오성식과 동기로 한 솥밥을 먹기도 했다. 고교 졸업 무렵, 오성식과 함께 중앙대로 갈 예정이었으나 오성식이 연세대로 갑자기 진로를 바뀌면서 그는 예정된 대학 진로를 포기하고 생업의 길로 들어섰다.
군대에 다녀온 뒤 여러 일을 거치며 현재의 일로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그는 중도에 그만둔 농구에 대한 못다한 한을 갖고 있었다. 오랫동안 운전 일을 하다보면 근력, 지구력이 떨어지는 것을 느낀 그는 건강도 관리할 겸 농구공을 잡고 틈틈이 몸을 풀었다. 주말 등을 이용해 동아리 농구팀에서 농구를 하면서 그의 실력은 점차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2020년 3월 그를 중심으로 농구를 좋아하는 여러 명이 친선을 도모하고 건강도 관리하자며 ‘5080’ 농구 동아리팀을 만들었다. 동아리 이름은 50대에 막 들어선 창립 회원들이 80대까지도 농구를 계속 하자는 뜻으로 지었다고 한다.
부산의 명문 농구 동아리 ‘5080’
지난 달 30일 부산으로 부산 명문 농구 동아리 ‘5080’을 취재하려 내려갔을 때, 부산지역 연고팀 프로농구 KCC는 2023-2024 챔피언결정전에서 2승1패로 우승을 향해 앞서 나갔다. 그동안 부산은 프로농구와는 그렇게 가까운 도시는 아니었다.
부산은 2000년대 들어 야구, 축구, 농구, 배구의 4대 프로스포츠에서 그동안 우승팀을 배출하지 못했다. 서울은 물론 인천, 대구, 광주, 대전, 울산 등에서도 모두 우승팀이 나왔지만 부산만은 예외였다.
부산은 원래 롯데 자이언츠가 대표하는 ‘야구 도시’로 유명했다. 롯데 야구팬들의 열성은 국내 최고다. 하지만 높은 인기에 비해 야구팀 성적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1984년, 1992년 한국시리즈 우승 이후 정상에 오르지 못했다. 프로축구의 경우도 1997년 대우 로얄즈(현 부산 아이파크)가 마지막 우승이었다.
프로농구에선 부산 기아(현 울산 현대모비스)가 KBL(한국농구연맹) 출범 원년인 1997년 챔피언전 우승을 한 뒤 2001-2002 시즌부터 울산으로 연고지역을 옮겨갔다. 이후 KT가 KTF 시절인 2003-2004시즌부터 부산을 안방으로 삼았다. 2007년 챔피언전 준우승을 했으며, 2010-2011시즌엔 처음 정규리그 1위를 했는데, 4강 플레이오프에서 리그 4위였던 원주 동부에게 져 탈락했다.
KCC는 2023-2024 시즌을 앞두고 연고지를 전주에서 부산으로 옮겼다. 개막 전부터 부산팬들로부터 큰 기대를 모았지만, 주축 선수들의 부상과 호흡 문제로 생각보다 강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해 정규리그 5위에 머물렀다. 하지만 플레이오프에서 진면목을 보여줬다. 6강 PO에서 서울 SK를 가볍게 눌렀고, 4강 PO에서는 정규시즌 챔피언 원주 DB도 잡아냈다.
당연히 화제는 부산 KCC가 먼저 등장했다. ‘5080’ 농구 동아리 회원들도 그동안 부산 지역에서 프로농구가 흥행에 성공하지 못해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가 올해 KCC가 선전을 하면서 본격적인 관심을 두게됐다고 한다.
농구 선수 출신인 ‘5080’ 회원 김성룡씨도 KCC를 통해 부산 지역에서 농구 붐이 살아났으면 한다고 했다. ‘5080’ 팀 유니폼을 KCC 프로 유니폼 비슷하게 맞춘 것도 좋은 성적을 올리기를 기원하는 뜻이라고 한다.
부산 지역에는 사실 중고나 대학 엘리트 팀들은 많지 않지만 동아리 팀들은 나이별로 꽤 많이 있다. 동별, 구별, 클럽 및 동아리 별로 많은 팀들이 친선 대회나 각종 대항 대회에 출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가운데 전국무대에 잘 알려진 팀은 단연 ‘5080’이다. 팀은 2020년 창단 이후 주말 마다 부산 신라중에서 전용 체육관을 마련해 주기적으로 운동을 하며 실력을 키워왔다. 창단 이듬해 인 2021년 겨울 충청도 아버지 농구대회 50대부에서 3위를 차지한 것을 시작으로 작년 서울 강동구 협회장배 농구대회 55세부에서 준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5080’팀은 기회가 주어지면 부산과 가까운 일본 후쿠오카 동아리팀과 정기 교류전을 가질 계획이다. 아직은 일본 측에서 50대 이상 동아리 농구가 활발하지는 않지만 점차 동호인 인구가 늘어나는 추세라 한일 농구 동아리 대회도 가능할 것으로 예상한다.
서로의 눈빛만 봐도 아는 외인구단
‘5080’은 현재 회원이 40여명 정도 된다. 회원 직업은 중학교 교장 선생님, 예비역 소령, 화물 트레일러 기사, 법원 공무원, 철강 근로자, 일반 회사원, 개인 사업가 등 다양하다. 다양한 직업을 가진 회원들은 농구장에만 오면 서로의 눈빛만 봐도 아는 ‘외인구단’과 같은 팀으로 변한다. 외인구단은 이현세 작가의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에 등장하는 야구단을 말한다. 외인구단은 기존의 야구계에서 배척당했던 선수들로 구성된 팀으로, 뛰어난 실력과 열정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외인구단은 한국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서로 자유롭게 연습을 해 나갔다. 법원 해산기업 감리일을 보는 우윤범(55) 회장을 포함해 회원들은 서로 다른 색깔의 농구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가드, 포워드, 센터 진을 제대로 갖추는데는 적지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우윤범 회장을 포인트 가드로, 농구 선수출신 김성룡 씨는 골밑을 담당하면서 팀 골격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우 회장은 중고교 동아리 농구 시절부터 농구공을 만져 볼 배급과 패스웍이 매우 뛰어나다. 김성룡 씨는 선수출신 답게 위치 선정과 볼 집착력이 남달랐다. 학생 시절 조정 선수 출신인 철강 근로자 유영배 씨도 조정으로 다져진 근력을 앞세워 골밑에서 몸싸움에 결코 밀리지 않는다. 이름이 특이한 왕정빈 씨도 빠른 드리블과 스피드 넘친 슛으로 코트를 휘젖는다.
막강 경기에 들어가면 이들은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서로의 눈빛과 마음을 통해 교감을 이뤄낸다고한다. 우 회장은 “모두가 혼연일체가 돼 경기를 풀어간다”며 “나보다 상대의 눈빛을 보며 서로 애쓰는 모습을 보면 정말 진한 감정을 느낀다”고 말한다.
회원 가운데는 부산 반송중학교 김왕백 교장, 이성호 예비역 소령 등은 고문으로 활동하며 경기가 있을 때 장내 안팎에서 ‘지원 사령관’ 역할을 한다고 한다. 재무이사 이재홍 씨는 “코로나 때에도 쉬지 않고 운동을 계속 했다”며 “회원들의 우의는 남다르다. 서로 챙겨주고 밀어주며 활발하게 교류를 한다”고 말한다.
운동으로 건강과 자존감 지킨다
‘5080’ 회원들이 동아리 농구를 하는 최대 장점으로 꼽는 것은 건강과 자존감을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이다. 농구를 계속 하면서 건강이 좋아지며 일상에서 긍정적인 생각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우 회장은 50대 중반의 나이에도 체력이나 몸 움직임이 웬만한 40대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한다. 연습 후 땀을 흘리고 샤워을 하고난 후 시원한 맥주 한 잔 마시는 것을 즐기며 인생의 맛을 느낀다고 그는 말한다.
우 회장은 “우리 나이 되면 가정과 직장에서 많은 소외감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운동을 하고 나면 새로운 자신감이 불쑥 불쑥 생겨난다”며 “운동을 하지 않는 주위 친구들에게 운동을 하라고 자주 권하곤 한다”며 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5080’ 농구팀은 웬만한 엘리트 농구팀 보다 팀웍이나 화합이 잘 이루어지는 것 같았다. 팀 명칭 그대로 이들이 80세까지 평안하게 농구를 즐기고 건강을 챙기며 멋진 삶을 살기를 기대한다. [부산=김학수 기자]
[김학수 마니아타임즈 기자 / kimbundang@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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