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거리라는 말은 일본식 한자어이다. 가운데를 의미하는 ‘중(中)’과 길이를 의미하는 ‘거리(距離)’로 구성된 말이다. 중거리는 영어 ‘middle distance’를 번역한 말이다. 육상 용어로 정확한 명칭은 중거리 경기로 표기하며, 영어로는 ‘middle distance events’라고 적는다.
일본대백과사전에 따르면 1923년 발간된 ‘육상 경기법’에서 처음으로 중거리 경기에 대한 해설이 나온다. 우리나라에선 일제강점기 시절 언론 등에서 중거리라는 말을 보도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일보 1925년 2월18일자 ‘금년운동계(今年運動界) 진용(陣容)은 엇더할가 각교순방기(各校巡訪記)’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야구, 축구, 육상 등 다양한 종목에서 이름을 날린 한국 스포츠의 레전드 이영민이 배재고를 졸업하고 연희전문으로 진학한다면서 육상 중거리 선수로도 뛰었다고 전했다.
중거리 종목은 스타팅 블록에서 출발하는 단거리와는 달리 스탠딩 스타트로 출발한다. 800m는 출발 후 처음 120m는 레인을 따라 뛰고 이후부터 오픈 코스로 자유롭게 뛸 수 있다. 1,500m 이상 종목은 출발부터 오픈 코스로 달린다.
중거리는 ‘달리는 격투기’로 불린다. 레인을 달리면서 좀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몸싸움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중거리는 많은 선수들이 400m 트랙을 오픈 코스로 달려 서로 부딪치거나 뒤엉키기가 쉽다. 올림픽이나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 선수들의 충돌 장면이 자주 나온다.
아직까지 회자되는 대표적인 충돌 사건은 1984년 LA 올림픽 여자 3000m 레이스 도중 메리 데커(미국)과 졸라 버드(영국) 사이에서 일어났다. 메리 데커는 LA 올림픽 출전 이전에도 이미 7번의 세계 기록을 세울 정도로 유명한 세계적 스타였다. 하지만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서는 부상으로, 4년뒤 모스크바 올림픽서는 소련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항의하는 서방국가들의 보이콧으로 각각 출전할 수 없었다. LA 올림픽은 데커에게 올림픽에서 첫 우승을 차지할 수 있는 중요한 무대였다. 반면 졸라 버드는 떠오르는 샛별이었다. LA 올림픽이 열렸던 그해 초 데커가 보유하고 있던 5000m 세계기록을 깼다. 특유의 맨발 주법과 함께 단숨에 스타덤에 올랐다. 이 둘의 맞대결은 LA 올림픽 전체에서도 손꼽혔던 빅 이벤트였다.
하지만 경기 결과는 두 선수 모두에게 참담했다. 선두로 달리던 데커의 뒤를 쫓던 버드는 1600m 지점을 넘어서면서 추월에 성공했다. 그런데 이후 앞서 달리던 버드의 발에 추격하던 데커가 걸려 넘어지는 사고가 벌어졌다. 트랙밖으로 넘어진 데커는 부상을 당하면서 레이스를 중도 포기했다. 데커가 멀어져가는 버드를 바라보면서 눈물을 쏟는 모습은 그해 가장 유명한 스포츠 사진이 될 정도였다. 미국의 홈팬들은 당연히 버드를 향해 야유를 퍼붓었다. 심리적으로 크게 흔들린 버드도 결국 7위의 초라한 성적으로 레이스를 마쳤다. 중거리의 몸싸움이 빚어낸 가장 유명한 비극이었다. 공교롭게도 여자 3000m는 이후 정식종목에서 사라졌다.
중거리에선 선수들간의 몸싸움을 피하기 위해 달리는 것 못지않게 레이스 전략이 중요하다. 빠르거나 강한 선수가 반드시 중거리에서 이기지 않기 때문이다. 중거리 승부는 마지막 300m, 400m 정도에서 가려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선수들의 전술적인 감각과 지능이 요구된다. 중거리 종목은 승부에 복합적인 요소가 작용한다고 해서 ‘육상 하이브리드’라고 불리기도 한다.
남자 800m와 1500m는 1896년 제1회 아테네올림픽부터 채택됐다. 여자 800m는 1928년 암스테르담올림픽에서 처음 채택된 뒤 없어졌다가 1960년 로마올림픽에서 부활했다. 여자 1500m는 뮌헨올림픽에서부터 처음 열리기 시작했다. LA올림픽 이후 폐지된 여자 3000m는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에서 5000m로 대체됐다.
[김학수 마니아타임즈 편집국장 kimbundang@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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