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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스포츠 100년](76)광복 이후에도 이어진 경평전(서울-평양전)

2021-09-07 08:30

1929년 10월 조선일보사 주최로 열린 경평축구 모습.[조선일보 1929년 10월 11일자]
1929년 10월 조선일보사 주최로 열린 경평축구 모습.[조선일보 1929년 10월 11일자]
광복 이후 서울과 평양의 체육교류

광복 직후만 해도 한동안 남과 북을 서로 오갈 수 있었다.

1945년 10월 27일부터 5일 동안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자유해방경축 종합경기대회에는 북측 선수들이 참가해 해주 출신의 김원권이 멀리뛰기와 삼단뛰기에서 우승했다. 이듬해 1월 29일 한강특설링크에서 열린 자유해방경축 동계대회에서도 북쪽 선수들이 출전해 안주 출신 김희라가 빙상 남자 일반부 500m에서 3위, 같은 안주 출신인 김성윤이 1500m에서 5위, 신의주 출신인 김영환이 10000m에서 3위를 차지했다는 기록도 있다.

종합경기대회 외에 단일 종목에서도 한동안 남북 교류가 이어졌다.

대표적인 예가 경평축구다. (대한민국 스포츠 100년 36~38 참조)

서울과 평양의 축구대항전인 경평축구 첫 대회는 일제강점기인 1929년 10월 8일부터 10일까지 서울에서 열렸다. 당시에는 팀 대신 군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서울팀은 전경성군으로, 평양팀은 전평양군으로 불렸다. 전경성군은 조선축구단과 연희전문, 경신중학 출신 선수들이 주축을 이뤘고 전평양군은 무오축구단과 일본 최강팀인 와세다대학을 7-0으로 대파해 이름을 날린 숭실학교를 중심으로 구성됐다.

첫 경평 대결에서 전평양군은 2승1무로 전경성군을 이겼는데 평양으로 돌아간 선수들은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당시 보도를 보면 첫 경기에는 무려 7000여명의 관중이 몰렸고 대회 기간 동안 문을 닫는 가게가 많았다고 한다. 또 경성과 평양을 오가는 기차는 응원인파로 가득했고 경기에 이긴 평양의 양조장들이 행인들에게 막걸리를 공짜로 돌렸다는 기록도 있다.

이듬해 열린 2회 대회에서는 전경성군이 2승1패로 앞서 첫 대회의 패배를 설욕했는데 이 대회를 마지막으로 조선일보 주최 경평축구는 중단됐다. 3년 후인 1933년 경성축구단과 평양축구단이 창단되면서 조선축구협회 주선으로 봄, 가을 두 차례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대회를 열었다.

경성축구단과 평양축구단은 경기 스타일도 대조적이었다. 경성군이 개인기와 전술 위주의 플레이를 한 반면 평양군은 체력을 앞세운 육탄전이 무기였다. 재미있는 사실은 평양 기생들이 평양축구단과 끈끈한 관계에 있었다는 점이다. 평양에 육성학교가 있을 만큼 당시 평양 기생들은 이름을 날렸는데 이들이 평양축구단의 열렬한 후원자였다는 것이다. 1935년 평양축구단이 도쿄에서 열린 메이지신궁대회에 나갈 때 연주회를 열어 그 수익금을 원정비용에 보탠 것도 평양기생들이었다고 한다.

경성과 평양 축구단이 출범하자 4월 평양이 먼저 경성축구단을 초청해 세 차례 경기를 가졌는데 결과는 1승1무1패였다. 이어 10월 평양에서 다시 경기가 열렸는데 세 경기 모두 무승부로 끝났다.

이듬해 4월에는 서울의 배재고보 운동장에서 두 차례 경기가 열려 평양축구단이 1승1무로 패권을 차지했다. 경평축구 대항전은 1935년 4월에 열린 4회 대회를 끝으로 다시 중단된다. 판정 문제로 블상사가 발생하고 지역감정까지 더해져 더 이상 대회를 지속할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달았기 때문이다.

당시 각계는 대회 중단에 아쉬움을 금치 못하고 재개를 촉구했지만 승부욕이 지나쳐 대회 때마다 충돌이 발생하는 상황에서 근본적이 대책 없이 다시 대회를 여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고심 끝에 서울과 평양에 관북지방의 축구 강호인 함흥을 포함시켜 세 도시 대항전을 개최하는 방안이 나왔다. 이에 따라 1938년 10월 경성운동장에서 3도시 대항전이 열리게 된다. 그러나 이 또한 1942년 일제가 구기종목을 전면 금지함에 따라 중지되고 말았다.

광복 후 마지막 경평축구
경평축구대항전은 당시 전국을 들썩이게 한 빅이벤트였다. 기호지방과 관서지방을 대표하는 도시인 서울과 평양에 당대 최고의 선수들이 모여 축구단을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양강 구도가 형성되면서 이들의 대결이 벌어지면 서울과 평양 뿐 아니라 전국이 열광할 정도였다. 그러니만큼 맥이 끊어진 경평축구대항전에 대한 향수는 클 수밖에 없었다. 광복과 함께 체육인들이 경평축구대항전 명맥 잇기에 매달린 것도 그래서였다.

광복 후 처음이자 마지막 경평축구대항전은 자유신문사 주최로 1946년 3월 서울운동장에서 열렸다. 일제의 구기종목 금지조치 후 4년 만에 다시 열리는 대회였기에 시민들의 관심은 광적이라고 할 만큼 뜨거웠다. 25일의 1차전에서는 서울이 2-1로 이겼고 27일 2차전이 열렸는데 평양축구단이 3-1로 앞선 가운데 관중 난동이 벌어져 경찰이 최루탄을 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당시 장원진을 단장으로 하는 평양축구단 선수들은 북쪽에 진주한 소련군의 허가를 받아 트럭과 배편으로 닷새 만에 서울에 왔다. 선수단은 평양으로 돌아갈 때는 육로가 위험해 뱃길을 택해야 했다. 선수들은 돌아가는 길에 서울에서 구입해 갖고 가던 선물 보따리를 모두 소련군에게 빼앗겼다는 후문이다.

평양축구단은 다음해에 서울팀을 초청하겠다고 약속했으나 38선으로 남북통행이 금지되면서 그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경평축구도 이 대회를 끝으로 다시 중단되고 만다.

당시 출전했던 서울과 평양 축구단 선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서울군

△감독=김화집 △주무=편무영 △선수=김용식 차순종 박규정 박명삼 박태종 민병익 김규환 이용일 민병대 최성곤 김용식 이영창 임창식 우정환 정남시 배종호

◇평양군

△단장=이구원 △총무=김극환 △감독=강기순 △주무=박의현 △선수=주영광 이병국 이석영 이종덕 옥정빈 임창훈 장병오 정근호 차순옥 홍정덕 김인모 오영환 박원근 김용성 김재윤 박창갑 오진환 황정하

1931년에 열린 평양의 숭실전문 대 보성전문의 농구 경기 모습
1931년에 열린 평양의 숭실전문 대 보성전문의 농구 경기 모습
빙상,
농구도 경평전
광복 후 단일종목에서 축구보다 먼저 북쪽 선수들이 참가한 대회는 빙상이다. 1946년 2월 2일부터 강원도 춘천 소양강 특설링크에서 열린 제1회 전국빙상선수권대회가 그 무대였다. 안주 출신 김성규와 평양 출신 신영길은 남자500m에서 각각 1, 3위를 차지했고 5000m에서는 신의주의 김영환이 4위에 올랐다. 북쪽 선수들은 아이스하키에서 강세를 보여 평양팀이 준결승에서 연전을 16-0, 결승에서 개성팀을 3-0으로 누르고 우승했다.

이 대회는 1948년 생모리츠동계올림픽 파견후보 선발전을 겸했는데 북쪽 선수 중에는 김성규 김영환과 평양의 배성묵 신영길 김기철이 남자 1차후보로, 장인숙(평양)이 여자 1차 후보로 선발됐고 16명을 선발한 아이스하키에는 최기영 최영신 손영욱 선우명승 김응섭 황기엽 등 평양선수 6명이 끼었다. 그러나 이들은 남북이 가로막히면서 최종선발전에는 참가하지 못했다.

농구도 경평전이 있었다.

서울의 농구는 황성기독교청년회를 중심으로 평양의 농구는 관서체육회가 중심이었다.

1924년 조만식을 회장으로 창립된 관서체육회는 농구대회를 축구 빙상 씨름 야구 등과 함께 연중행사로 개최했고 평양고보는 농구 명문으로 손꼽혔다. 평양 뿐 아니라 인근 선천과 재령 사리원 해주 등도 농구 열기가 대단했다. 사리원과 해주에서는 해마다 여름에 농구대회가 열렸다.

정식으로 경평전의 이름을 내건 서울과 평양의 농구대결은 1935년 1월에 열렸다. 기청체육관에서 열린 제1회 경평 중등농구연맹전이 그것이다. 서울 대표 중동학교와 평양 대표 숭인상업의 대결로 열린 이 대회에서 양 팀은 1승1패를 기록했다.

광복 후 북쪽 선수들이 참가한 첫 농구대회는 1946년 3월 20일부터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제1회 전국종합농구선수권대회다. 남자부에 출전한 평양선발은 2회전에서 연희전문을 30-24, 준결승에서 세무서를 82-45로 물리쳤으나 결승전에서 신흥실업에 32-48로 져 준우승에 머물렀다.

이어 3월 24일부터 이틀간은 조선스포츠사 주최로 경평농구전이 열렸다.

경성군의 진용은 △감독=안태경 △주무=이희주 △주장=장이진 △선수=조득준 방원순 이상훈 강봉현 윤항섭 최해룡 이준영 이중윤이었고 평양군은 △주무=강영학 △코치=박인형 △선수=김정신 변승목 오중열 이성업 김훈수 윤용진 장문경 백현덕 문명익 김일성 김창하 주인덕이었다. 경기는 두 차례 열렸는데 두 경기 모두 경성군이 평양군을 45-40, 43-31로 물리쳤다.

1946년 3월의 축구와 농구 경평전을 마지막으로 남과 북의 스포츠 교류는 중단된다. 북은 1948년 5월 북조선중앙체육지도위원회를 결성해 체계를 강화했다. 이어 9월 북조선 정부수립과 함께 북쪽 주민들만을 대상으로 한 인민체력 검정제도를 실시하면서 남북체육은 분단의 시기로 접어들었다.

[정태화 마니아타임즈 기자/cth082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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