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우완 신인 인현배 역시 데뷔 첫 해에 10승을 거두면서 일단 실력으로 먼저 야구팬들 앞에 나타났고, 대학시절 최고의 대형 좌타자로 이름났던 허문회 역시 시즌 전부터 많은 기대를 품게 했던 이였다. 사상 유래 없는 신인 잔치 속에서 LG는 압도적인 승률을 바탕으로 거뜬하게 정규시즌 1위를 기록했다.
엇갈린 운명, 서용빈과 허문회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다소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LG는 1994 시즌을 앞두고 프랜차이즈 스타인 1루수 김상훈을 해태(KIA 타이거즈 전신)로 보내는 트레이드를 단행한 바 있다. 그리고 그들이 데려 온 선수가 바로 3루수 한대화였다. 이미 1993 시즌에 빙그레(한화 이글스 전신)로부터 같은 포지션의 조양근을 영입했던 LG로서는 다소 뜻밖의 선택이었다. 아니다 싶을 경우 주로 지명 타자로 나섰던 이병훈을 써도 무방했지만, 그마저 김상훈과 함께 해태로 떠나면서 말 그대로 LG의 1루수 자리는 무주공산이었다.
그래서 이광환 당시 LG 감독이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신인들의 파격적인 기용이었다. 이미 김재박이 떠난 자리에는 유지현이 자리를 잡고 있었고, 노쇠화가 진행 중이었던 외야 한 자리는 김재현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주인 없는 1루 자리에는 대학 최고의 거포, 허문회가 낙점될 것이라고 보는 이들이 많았다. 경성대 시절, 4할 타율을 기록하며 그 해 대학 최고의 타자로 우뚝 선 그를 그냥 지나친다는 것도 넌센스였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포스트 김상훈’은 서용빈의 차지였다.
1994 신인지명 회의에서 가장 늦은 2차 6번에 입단한 서용빈은 허문회에 비해 크게 알려지지 않은 유망주였다. 허문회가 해태에 2차 1번 지명을 받은 이후 ‘김상훈-한대화 트레이드’의 사전 협의에 따라 지명권을 양도받아 LG로 온 것과는 사뭇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그러나 서용빈은 특유의 끈기를 바탕으로 훈련량을 남들의 배 이상을 늘렸고, 이는 곧바로 이광환 감독의 눈에 들기 시작했다. 당시 스프링캠프를 찾은 재일동포 야구 선수 출신 장훈씨가 서용빈을 향하여 “넌 타격 폼에 특별한 단점은 없다.”라고 조언한 것도 그의 잠재력을 끌어 올리게 된 계기가 됐다. 이에 서용빈은 한 번 찾아 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사이클링’을 기록하는 이변을 연출하며 ‘붙박이 1루수’로서의 위상을 공고히 했다.
하지만 허문회도 만만치 않았다. 그 해 51경기에 주로 대타로 출전하면서 타율 0.304로 나름 쏠쏠한 활약을 펼쳤기 때문이었다. 이후에도 꾸준히 대타로서 제 몫을 다 했던 그는 2001 시즌을 앞두고 롯데로 트레이드 됐지만, 2년 만에 다시 친정팀으로 복귀했다. 현역 시절 단 한 번도 규정타석을 채우지 못했지만, 든든한 백업 요원으로 활약한 부분까지 간과되어서는 곤란하다. 그는 2003 시즌을 마지막으로 현역 은퇴를 선언했는데, 그가 10시즌 동안 거두었던 성적은 타율 0.269, 274안타, 20홈런, 129타점에 이르렀다.
한편 서용빈은 1997 시즌까지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다가 병역 문제로 2년간 그라운드를 떠나 있어야 했는데, 공백기간에도 불구하고 2000년 돌아왔을 때 그는 100경기에서 0.274의 타율을 기록하고 있었다. 이러한 모습은 2002년까지 지속됐고, 사실상 여기에서 서용빈의 현역 생활은 끝난 셈이었다. 2005년과 2006년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지만, 두 시즌 합쳐 47경기 출장에 그쳤기 때문이었다. 끝은 화려하지 못했지만, 그는 2006년까지 총 9시즌을 소화하며 통산 타율 0.290, 760안타, 22홈런, 350타점을 기록했다.
입단 당시 큰 주목을 받았던 대형 타자 허문회와 프로 입문 자체만으로도 큰 영광이었던 서용빈의 운명은 이렇게 나뉘어졌다. 올해에는 서용빈 코치가 해외 연수로 잠시 자리를 비운 반면, 허문회 코치는 2013 시즌 이후 2년째 넥센에서 타격 코치를 맡게 됐다. 공교롭게도 둘 모두 은퇴 이후 타격 코치로서 각자의 소속팀에서 인정받는 지도자로 거듭나고 있다는 공통분모를 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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